아마도 1990년이었던 것 같다. 그 시절 나는 수원에 있는 학교까지 국철을 타고 다녔다. 환승역의 대명사인 신도림역의 소음과 인파는 지금도 공포스럽다. 집으로 가기 위해 2호선으로 갈아탄 나는 늘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아줌마를 힐끗 쳐다본 기억이 난다. 그 아줌마는 전철문이 닫히기 전 필사적으로 계단을 내려와 전철에 몸을 실으려 했지만 아줌마 코앞에서 문은 야속하게 닫히고 말았다. 전철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전철을 놓친 아줌마는 무안하지만 억울하다는 얼굴로 승강장에 서 있었던 것 같다.
저 아줌마 어떡하면 좋아… 나야말로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아줌마가 안 돼보여서 눈물까지 핑 돌았다. 그때 나는 탈모가 시작될 만큼 근심 걱정을 안고 사는 대학교 3학년생이었는데, 모두가 그랬듯이 불투명하고 불안정한 미래가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타인의 스쳐가는 허탈한 표정 하나에도 울컥했던 것 같다.
여기서부터 배제당하면 안 되는데, 나는 더 노력해야 되는데, 나를 더 계발해야 하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듯이 나도 높은 연봉에 넓은 집과 큰 차를 소유해야 하는데… 아마도 나는 만나보지도 못한 마거릿 대처라는 영국 할머니의 망령에 사로잡혔던 게 분명하다. 그리 하여 아마도 병원엘 찾아갔다면 ‘당신은 우울증입니다’라는 진단도 그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받아냈을 것이다.
지방대라는 말보다 더 차별적으로 들렸던 수도권대, 그리고 특징없는 행정학과, 거기다 용모가 단정치 못한 여대생… 그때 아무리 경제가 호황이어도 이 정도면 빌빌거리기 딱 좋은 캐릭터였다. <차브>들처럼 감히 마약에 손을 대지도 않았고, 강심장이 못돼 십대에 아이를 갖지도 않았고, 패거리로 다니며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지도 않은 나는 대학생인데다 자존심은 있어서 스스로를 잉여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도 어쩐지 누군가 나를 깔볼까봐 늘 공격적인 태세로 이십대를 보냈다.
나의 옛 모습이지만 참, 못났다. 나는 당신들처럼 허접 쓰레기가 아니야, 라고 늘 다짐하며 수원행 열차를 기다렸지만 결국 나는 있지도 않은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 다른 클래스에 내 삶을 안착시키고 싶어 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세상이 요구하는 삶이었고, 옳고 그른 걸 따지는 건 촌스러울 뿐 아니라 구차해보였기 때문이다. 가난하면 가난할 수밖에 없도록 니가 무능력하고 게을렀기 때문이라고 사람들은 서로를 비난했다. 그러면 편리했다. 사회의 은폐된 구조적인 악은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매스컴과 정치인들이 떠드는 대로 생각없이 사는 건 정말 완전 편리한 삶의 방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전철을 놓친 어떤 아줌마에게 ‘다음 전철이 곧 오니까 앉아서 좀 쉬면서 기다리세요.’라고 위로하고 싶었던 내가 찌질해 보였다. 참, 못나기도 했지만 그래서 내 이십대가 아직도 짠하기도 하다.
“모독당한 인간 존엄을 위하여”라고 적힌 겉표지의 문구만으로도 큰 위로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내가 당한 것은 모독이 아니라 나의 탐욕에 기인한 어리석음이었지만, 지금 이 사회에 필요한 건 경쟁과 비난이 아니라 협력과 평등임을, 또한 상식적이고도 친절한 말 한마디임을 <차브>를 읽으며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