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와 연필에 바치는 완벽한 찬사!
소녈 네트워크 시대에 되짚어보는 손편지 한통의 의미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쓴 독서 에세이 『혼자 책 읽는 시간』으로 오프라 윈프리의 극찬을 받으며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니나 상코비치의 두번째 책이다. 고대 이집트의 편지에서 조선 시대 정약용의 편지까지 동서고금 100여 통의 편지를 망라한 이 책에서 저자는 문자메시지와 SNS 시대에 손편지의 참된 의미는 무엇인지를 되묻는다. 글쓰기의 체취와 감촉이 점점 사라져가는 시대에 『혼자 편지 쓰는 시간』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과 감각을 되살리는 멋진 여행이 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우연한 ‘발견’ 덕분이었다. 마음에 딱 드는 새 집을 계약한 저자는 그 집 창고에서 백여년 전 씌어진 편지다발을 발견한다. 그 편지는 이제 막 대학에 진학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보낸 것으로, 자식을 키우는 입장인 저자에게 깊은 공감을 준다. 저자는 이 편지 덕분에 손으로 쓴 글의 힘을 재확인한다. 백년도 전에 살았던 한 청년의 편지를 읽으며 이제는 대학생이 되어 떨어져 사는 아들을 직접 만지고 확인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런 연결고리는 수년 전 숨을 거둔 언니 앤 마리가 남긴 편지에서도 느껴진다. 편지는 어떤 기록보다 상대방의 체취를 더 잘 간직하고 있다. 종이의 촉감, 잉크의 냄새, 손글씨의 모양 등을 확인하며 저자는 마치 언니를 품에 안고 있는 듯한 상상에 잠긴다. 이것이 바로 편지만이 줄 수 있는 깊은 유대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1·2장)
종이와 잉크, 손글씨가 간직한 매력
어떤 이메일도 흉내낼 수 없는 손편지만의 이 독특함 유대감에 더해, 저자는 편지와 편지 사이에 가로놓인 ‘기다림’을 칭송한다. 저자의 아버지는 독일과 소련의 전쟁을 피해 벨라루스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다. 힘든 정착 과정에서도 아버지는 편지 덕분에 고향이라는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고향으로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 오기까지 한두 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절대 초조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았고, 프랑스어나 체스를 배우면서 그 시간을 의연히 견뎌냈다. 틈만 나면 핸드폰을 꺼내 문자메시지나 SNS를 확인하는 우리에게는 확실히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부족하다. 저자는 이렇게 되묻는다. ‘즉각적 답변에 대한 기대에 종속되는 삶은 어떤 기대만 가득할 뿐, 진실한 체험은 없는 것이 아닌가.’(8장)
이처럼 유대감과 기다림은 편지가 지닌 아주 매력적인 요소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편지의 매력이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오로지 ‘나만을 위해’ 손으로 글을 쓴다는 점이다. 그래서 편지에는 우정과 사랑이 넘쳐난다. 개성 강한 예술가였던 스튜어드는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커플과 평생의 편지 친구로 우정을 나누었다. 또한 만화가 에드워드 고리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때 겉봉투에다 꼭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넣기로 유명했다. 윌리엄 스태포드와 마빈 벨은 둘 다 시인으로, 서로의 감정을 시에 담아 편지로 띄웠으며 그것을 모아 나중에 시집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스티글리츠와 오키프는 31년간 2만 5천통의 따듯한 애정이 담긴 편지를 교환했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으로 유명한 J. D. 샐린저 같은 작가는 젊은 여성들과의 밀회를 위해 편지를 이용하기도 했다.(4장)
왜 편지는 이렇듯 둘만의 각별한 소통에 기여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편지가 지닌 또다른 특성, 바로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공개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런 비밀유지 덕분에 편지는 종종 자기만의 강렬한 내면을 전달하는 매체가 되기도 한다. 중세말 한 수도원에서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나눈 편지가 발견되자 세간은 뜨거운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때까지 아벨라르는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종교인으로, 엘로이즈는 헌신적인 수녀원장으로만 알려졌다. 그러나 엘로이즈가 보낸 편지에는 아벨라르를 향한 뜨거운 욕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읽어도 낯뜨거울 정도의 육체적 갈망을 그대로 드러낸 엘로이즈의 편지는 열정적 사랑을 갈망하던 중세말 사람들에게 큰 자극제가 되었다.(3장)
따듯한 위로와 조언, 그리고 삶의 증거
동서고금에 걸친 100여 통의 편지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편지가 지닌 따듯하고 인간적인 덕목들에 귀를 기울인다. 그중에는 특히 한국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두 통의 조선 시대 편지가 소개된다. 그중 하나는 유배중인 다산 정약용이 또다른 유배지에 머무는 형 정약전에게 보낸 조언의 편지다. 다산은 거친 유배생활을 견디기 위해서라도 개를 잡아 몸을 보신하라고 형에게 조언한다. 시대의 아픔과 더불어 따듯한 형제애가 전해지는 대목이다.(9장) 또 하나는 조선의 한 아내가 남편의 무덤에 묻어준 편지다. 일찍 남편을 여읜 아내의 한이 눈물겹게 묻어나는 이 편지에서 아내는 “꿈에 당신을 보리라 믿고 있습니다”라며 애달픈 마음을 전한다.(11장) 편지는 이렇듯 조언이 되기도 하고, 서러운 고백이 되기도 한다.
글로 씌어진 기록이라는 면에서 편지는 증거의 성격을 가지기도 한다. 미국의 작가 퍼트리샤 콘웰은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가 남긴 편지를 근거로 당대의 화가인 월터 지커트를 살인범으로 추정했다. 반대로 헬렌 주이트 살인사건의 유력 용의자였던 로빈슨은 그가 쓴 편지가 법정에서 증거물로 채택되지 않은 덕분에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었다. 스탠리 가문 여성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으며 저자는 그 가족 특유의 강점과 단점, 뒷담화와 수다 등을 종합해 풍요로운 가족사를 반추해낸다. 이때 편지는 기록인 동시에 역사가 된다. 이 책이 묘한 역사 수업이 되는 이유이다.(5장)
이 책에는 여러 작가들의 편지들이 소개된다. 죽음에 천착한 작가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쾌활한 에밀리 디킨슨의 편지, 냉철한 모더니스트의 이미지를 내던진 듯 강렬한 욕망에 목말라하는 제임스 조이스 등의 편지를 읽노라면 이들의 작품과는 또다른 개성과 인격이 배어남을 목격한다.(6장) 저자는 또한 편지가 주변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는 점에 주목한다. 아들 윌리를 장티푸스로 잃은 링컨 가족에게 조문편지들이 답지한다. 이런 아픔을 바탕으로 링컨은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편지를 보내 동병상련을 나눈다. 편지는 먼저 떠난 사람을 잊지 않겠다는 약속을 글로 남김으로써 살아남은 자들이 삶을 이어나갈 용기를 준다. 상대방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다정한 위로가 되는 것이다.(7장)
이 책에서 저자가 던지는 끊임없는 질문은 이렇듯 편리한 SNS 시대에 왜 손편지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것이다. 그 질문에 답하면서 저자는 ‘관계’를 강조한다. 관계라는 진정한 원이 그려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답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반원’ 때문에 편지는 불멸의 존재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