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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베스트 독자리뷰

곰스크에서 길을 잃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 독자리뷰

by 북인더갭 2010. 12. 22.

vyulim님의 리뷰/ 교보 알라딘


속되지 않은 꿈을 찾는 일이 가능하리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조악한 복사본으로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처음 읽었던 것도 그 때, 스무 살 무렵이었다. 당시의 나는, 어쩌면 우리들 대부분은 속세에 뛰어들 용기를 내기엔 지나치게 겁이 많았고, 속세 너머 무언가를 찾을 수 있다 확신하는 데만큼은 겁이 없었다. 막연하고 불투명해 대충만 설명해도 폼 나고 가치 있는 삶의 지향으로 보이던 저마다의 ‘곰스크’는 그 시절 얼치기 인문학도나 게으른 문학 청년들에게 적절한 피난처이자 알리바이였다.

곰스크로 가는 차표를 살 용기는커녕 차표 살 여비 모을 부지런함도 없이 이십대를 보냈던 나는 겨우 밥벌이를 할 직장을 찾았고 잠시 ‘곰스크’를 잊었다. 그리고 ‘대략 엇비슷하게 현실적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술자리 치기를 빌어 ‘곰스크’로 가지 않은 선택의 아쉬움을 읊조리는 왕년의 우리들을 가끔 만날 때면 ‘곰스크로 떠난 것도 인생이고, 남은 것도 인생이다. 결국은 당신이 선택한, 바라마지 않았던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닌 것처럼 굴지 말고 만족하라’ 따위 충고를 던지곤 했다. 선택은 선택이다. 물릴 수 없는 것은 물릴 수 없다. 현명하지만 동어반복일 뿐인 충고. 난 애저녁에 곰스크로 떠나지 못하고 주저앉은 주인공에게 늙은 선생님이 던지는 충고를 습득했었나보다. 그건 나 자신을 위안하는 충고이기도 했다.

하지만 난 군대 훈련병 시절부터 위장 군기의 대명사로 불리었던 인간이었다. 그 충고는 어쩌면 ‘곰스크’를 포기하고 남기 위한 변명이 아니라 언젠가 떠나는 선택을 했을 때를 위한 변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난 주인공처럼, 아니 주인공보다 훨씬 안정된 삶과 예측 가능한 미래를 두려워했다. 결국 ‘곰스크’를 향해 떠났다. 삼십대 중반이 되기 전의 일이었다. 비교적 안정되었던 직장을 포기하고 위대한 드라마 한편 남기겠다고 작가가 되는 지망생의 길에 들어선 거다. 돈 버는 작가가 아닌 지망생인 한 내 밥벌이와 갑자기 들이닥치는 신산한 인생의 짐을 책임져야 하기에 이러저러한 임시직을 거치며 현재도 ‘곰스크’와는 거리가 먼 생계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 사이 고질적인 게으름과 여전한 용기 없음, 태생적인 무능함으로 여러 차례 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난 지금 어디쯤 와있는 것일까? 조금 늦게 고백하자면 난 이 책 옮긴이의 골방 후배이며, 옮긴이의 말 속 ‘이따금씩 만나면 정말 거짓말처럼 또다시 곰스크를 이야기하고 우리의 못다 이룬 꿈과 그 대신 얻은 아내며 아이들에 대해 수다를 떨어대는’ 우리들 중 한 사람이다. 그들은 나에게 곰스크로 떠난 용기를 진심으로 격려하고, 얼마간 부러워하며, 얼마간은 그들이 대리 만족할 만큼 충분히 이상적인 ‘곰스크’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안쓰러워해주는 것도 같다. 난 피식 웃으며 다시금 늙은 선생님의 충고를 반복하거나 생계형 인생의 고단함을 하소연한다. 떠난 이가 남은 이에게 하는 게 고작 시시한 넋두리라니.

우, 난 지금 어디쯤 와있는 것일까? 아직도 난 곰스크행 급행열차의 차표를 사모으고 있거나 어디로 가는 지 분명치 않은 열차를 타고 있거나 그곳에 도착하긴 했지만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고 주문을 건다. 곰스크의 희망을 포기했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나 또한 비록 평범하지만은 않은 나름의 방식으로 정착을 했지만, 오래된 곰스크의 갈망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근 이십년 만에 다시 읽은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더 이상 현실 때문에 꿈을 포기한 남성 가장의 정신승리법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어쩌면 곰스크행 헛발질을 꽤 오랬동안 하고 있는 신세 탓이리라. 그렇기에 이 길지 않은 중편을 읽고 작가가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곰스크에서 돌아와 내린 승객들에게 왜 곰스크에 대해 묻지 않을까? 물으면 그들은 무슨 얘기를 할까?

가령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한발 더 나아간다. 청춘 시절 록밴드 멤버의 꿈을 향해 몸을 던진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와 친구들을 만난다. 꿈을 포기하고 현실을 택한 친구들은 그에게 묻는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니 행복하니? 단란주점에서 술손님 비위 맞추기 위해 벌거벗고 기타치는 처지의 주인공은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떠난 자도 남은 자도 지나치게 힘없이 그려지긴 했지만 어쩌면 그 장면이 곰스크에 대해 한 걸음 더 나아간 지점이리라. 곰스크는 세상 저 너머에 있지 않다. 곰스크로 떠나서도 우린 거칠고 비루한 현실을 살아야 한다.

떠나지 않은 이라면 어떨까? 오래 전 나의 독서가 주인공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치우쳤다면 이번 독서에선 오히려 주인공의 아내에게 더 애정이 갔다. 저 답답한 남편 만나 고생이라고. 어쩌면 주인공의 관념 속 ‘곰스크’보다도 아내가 그곳 정착지에서 곰스크로 만들 수 있을 거 같았다.

십수년 전 이 책의 옮긴이인 선배는 내가 발로 쓰다만 소설을 보고 “모든 우화는 비극이다”라는 멋들어지지만 이해가 잘 되지는 않았던 전언을 남겼다. (그 소설에는 바이올린이 나왔고, 자전거가 나왔고 중국집이 나왔다. 소재만으로 낭만적 우화가 떠오르지 않는가?) 아직도 잘 이해하지 못한 그 전언을 <곰스크로 가는 기차>에 폼나게 적용해 보고 싶다. 늙은 선생님의 위로에도 이 소설은 비극적이다. 그건 이 소설이 삶의 디테일을 (어쩌면 작가가 의도적으로) 갖지 않은 우화이기 때문이다. 전언을 이렇게 바꿔보면 어떨까? “모든 코미디는 디테일에서 나온다.” 곰스크로 끝내 떠나지 못한 그들 부부의 삶의 속살을, 정착지에서의 좌충우돌한 삶을 그려본다면 그들의 인생이 그렇게 끔찍하지만은 않을 거다. 근원적으로는 결국 곰스크에 도달하지 못할 운명인, 우리 모두의 비극적 인생을 코미디로 구원하는 길은 삶의 디테일, 순간에 대한 천착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