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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베스트 독자리뷰

삐딱이 김실장의 책 읽기_여성의 입장에서 본 <곰스크로 가는 기차>

by 북인더갭 2010. 12. 28.

신혼열차라는 게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막 결혼식장을 빠져나온 부푼 가슴의 두 남녀가 미지의 그곳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에겐 기차가 가장 잘 어울린다. 신혼열차라… 당신은 촌빨의 극치(!)라며 웃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당신이 유토피아라 생각했던 그곳에서 벌써부터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현실이다. 신혼열차가 아닌 비행기나 자전거, 혹은 최신형 자가용 헬기를 타고 여기를 떠난다 해도 ‘거기’에 닿자마자 만나게 되는 건 ‘현실’뿐이다. 이래도 계속 웃을 수 있는가.

한 남자의 목표는 곰스크로 가는 것이다. 한 여자의 목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안타깝다. 그녀가 어린아이였을 때도 소녀였을 때도 추상적인 것을 꿈꿀 만한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할머니들처럼) 불균형의 시작이다. 한 남자는 점점 화를 내기 시작한다. 한 여자는 먼지투성이의 방을 살만하게 꾸미기 시작한다. 아슬아슬해진다. 한쪽은 고독과 무료함 속에서, 한쪽은 옷장과 안락의자 곁에서 외롭고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상한 커플이다. 아니 이상한 삶이다.

그런데 이 이상함이 낯설지는 않다.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이 남자는 거짓말쟁이 아니면 이기주의자, 둘 중의 하나다. 그 남자를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다’고 반격하는 이 여자는 세상에서 제일가는 겁쟁이거나 합리주의자, 둘 중 하나다. 이런 사람들 많이 봐왔는데, 끼리끼리 잘 만났다.

남자는 좀더 친절했어야 했다. 왜 곰스크라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지, 왜 꼭 ‘너’와 함께 떠나야만 하는지 간절히 설명해야 했다. 여자는 좀더 거칠었어야 했다. 왜 내가 너랑 곰스크라는 낯선 곳으로 떠나야 하는지, 왜 준비도 안된 채로 거기서 새 삶을 시작해야 하는지, 한번쯤은 내질러줬어야 했다. 그랬다면 차라리 싸움은 빨리 끝났을 수도 있다.

삶은 대부분 그렇게 흘러간다. 말이 안 통해서 발을 구르며 소리를 지르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흘러간다. 어딘가 불공평하고 밑지는 듯하게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안락함을 얻었고 고정적인 수입을 얻었다. 결과적으로는 어떤가.

결국에는 이 이상한 삶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하게 된다. 추상적인 것과 구체적인 것들이 어떤 한정된 곳에서, 이를테면 거실이나 침실, 혹은 잘 정돈된 정원 같은 데서, 바로 그곳에서 울려오는 어린 자녀의 웃음소리 같은 것을 꿰뚫고 쩡 소리를 내며 부딪칠 때면, 아무 의미없어 보이는 삶조차도 결국에는 아름답다고 고백하게 된다. 뭐야 이건, 가슴을 통째로 후려치는 이 고통은 뭐야, 여긴 곰스크가 아니잖아, 기차는 떠났잖아, 우린 더이상 젊지도 않잖아, 당신과 나는 안주하며 나이를 먹어가잖아, 그리고 서로의 이야기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이러한 소통불능 상황에 이어지는 건 분노와 고독뿐이다. 하지만 균열의 틈을 타고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실핏줄 같은 동경은 늘 ‘거기’를 꿈꾸게 한다. 동시에 오래전부터 ‘여기’에 있었던 먼지알갱이들도 괴력을 발휘하며 우리를 붙잡기 시작한다. 유한하구나, ‘여기’와 ‘거기’를 모두 아우를 수 없는 게 삶이라는 거구나, 그래서 한쪽 어깨가 늘 무거웠던 거구나. 불안함과 불균형, 안타까움과 슬픔, 고독과 절망의 순간을 하나로 버무려 일상으로 녹여내는 삶을 그래서 슬프고 아름답다 말하는 거였구나.

당신도 이쯤에선 생각을 바꿔야 한다. 삶이라는 게 뻔하지, 중뿔난 삶이 어디 있나. 한번 더 촌빨의 극치로 생각을 몰아가야 한다. 나는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내 인생이 누구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는데…? 헛소리.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교장선생님의 한마디를 차라리 잊을 수 있다면 아무 문제없을 것이다. 우리의 거짓된 울분을 도려내고도 남을 만한 폭언이자 진실이다. 당신은 당신이 원한 삶을 살았다고, 당신 삶은 의미없는 삶이 아니라고, 당신이 원하지도 않았다면 당신은 이곳에 내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잔인하다. 그러니까 교장님의 말뜻인즉, 마누라와 애 탓하지 마라, 너는 니가 곰스크로 가길 평생 원했다 말하지만 너는 정원이 딸린 작은 집에서 일가를 이루고 사는 삶을 정말로 원했다, 너는 당장 인정하기 힘들겠지만 니가 원했던 삶은 곰스크가 아니었단 말이다, 지금의 이 모습이었단 말이다.

설마.

그렇다면 이렇게 가정해볼 수도 있다. 완벽한 거짓말쟁이는 교장선생님이라고. 그러면 동경에 찬 삶을 꿈꿔온 우리의 주인공 ‘나’는 평범한 인물로 전락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나’와 지금 숨쉬는 나를 동일시하며 묘한 연대의식을 느꼈던 나도 계속 나를 속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진짜 거짓말쟁인지는 끝까지 알 수 없다.

아이를 가지면서 말발까지 세진 여자의 의미심장한 펀치도 위력적이다. ‘인생이 의미를 가질지 아니면 망가질지는 오직 당신에게, 다른 사람이 아닌 당신에게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왜 직시하지 않는 거죠?’ 그런 건가. 정말 내 인생의 의미는 나에게만 달려 있는 건가. 그렇다면 여자는 자신의 삶을 직시하며 여기에 머무른 것인가. 다른 어떤 곳을 한번도 꿈꿔보지 못했으면서, 다른 곳에 가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여기가 우리의 자리라고 확신할 수 있는 거지? 그렇게 자신있는 삶을 살아왔다면 왜 더 강할 수 없었던 거지?

의심하기 시작하면 모든 말에는 다 거짓말이 섞여 있는 듯하다. 아내와 아이들을 지나쳐 남자가 다락방으로 올라가 틀어박히는 마지막 장면만으로는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힘들다. 그것이 쪽팔림이었는지 낭패감이었는지, 당신들이 뭘 알어, 하는 분노였는지, 막연한 후회의 감정이었는지. 그러니까 각자 ‘고집 센 어린아이처럼’ 외롭게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설명 안 해도 술술 통하는 소통불능의 경지까지 두 사람이 같이 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여기까지 같이 온 사람 아닌 그 누구도 당신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균형과 외로움을 동반한 아름다움은 그런 종류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이상한 아름다움. 기다리던 기차를 떠나보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움, 누군가에게 왜 자꾸 거짓말 하며 사니, 하며 불시의 질책을 받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아름다움, 말이 안 통하네, 하면서도 일체감을 느끼며 같이 살게 되는 혼란스런 아름다움.

아직도 신혼열차라는 게 있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행복했을지 불행했을지 간단히 말할 수 없는 게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여기’와 ‘거기’의 차이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여전히 실실 웃고 있는지, 그것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