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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 덕후극 _미들 마치/08. 31-33장

고전소설 덕후극_미들마치_08_31-33장

by 북인더갭 2024. 2. 13.

로저먼드는 자체발광이랄까.

미들마치 안에서는 로저먼드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화제였다.

그런데 마침 의사 리드게이트가 그녀의 오빠 프레드의 전염병으로 그 집안을 들락거리게 되었으니

말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만한 건수는 없었다.

 

로저먼드의 고모 해리엇(은행가 벌스트로드의 부인)도 소문을 들었다.

빈시 씨의 여동생은 조카의 앞날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사실을 확인하고도 싶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야. 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약혼을 하다니.”(504)

 

약혼 같은 것 하지 않았어요, 고모님.”

 

숨기지 말고 말해다오, 로저먼드, 리드게이트 씨가 실제로 청혼을 하던?”

 

청혼, 이란 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로저먼드.

 

넌 짝사랑하고 있구나.”

 

단칼에 로저먼드에게 굴욕감을 선사한 고모님은 이번에는 리드게이트에게로 달려간다.

 

미들마치 BBC 미니시리즈-해리엇 벌스트로드

 

특히 그 처녀가 몹시 사람의 눈을 끄는 데가 있거나 부모의 교제가 넓을 경우,

남자들이 가만두지를 않아요.

일시적인 기분에서 여자를 독점하고는 다른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게 해버리지요.

이렇게 해서 여자의 앞날을 막는 건 대단히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불쾌감을 느낀 리드게이트는 빈시 씨 댁 방문을 끊어버린다.

그는 몹시도 과학자답게(!) 로저먼드도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으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결혼 같은 거 생각하지도 않았으니까,

나는 연구를 해야 하니까, 나는 개업한 병원을 일으켜야 하니까,

무엇보다 나는 그녀에게 청혼의 자도 꺼내지 않았으니까.

 

(그래, 리드게이트, 이럴 때는 너님 홀로 독야청청 객관적이구나!

어쩜 이렇게 야비하게 썸을 타니)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열흘.

 

로저먼드는 실연의 상처에 제정신이 아니다.

그 시절, 이십대 초반의 여성이 내세울 자원은 뻔했다.

젊음과 미모라는 자본으로 로저먼드는 승승장구했다.

사실, 더 배울 수도, 집이 아닌 사회로 나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로저먼드가 달리 어떤 길을 택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공허하고 불안하게 로저먼드는 결혼이라는 단일 선택지만을 꿈꾸고 있었는데,

실연이라니. 그 맘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마침 소식을 전할 게 있어 불가피하게 빈시 가에 들를 수밖에 없었던 리드게이트.

로저먼드 빈시는 마침 집에 혼자 있었다.

두 남녀의 눈이 우연스럽게, 하지만 뜨겁게 마주친다.

 

그는 세차게 쏟아져 나오는 애정에 압도되어 다른 일은 모두 잊고

그녀의 몸에 팔을 돌려 부드럽게 위로하듯 포옹했다.’(513)

리드게이트와 로저먼드

 

 

게임은 끝났다. 두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될까.

 

 

한편. 

돈 많은 홀아비 페더스톤 영감님은 몸이 전 같지 않다.

연락을 끊고 살던 형제자매가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한다.

서로 걱정하는 척 경계하고 의심하느라 페더스톤의 스톤관에는 마차가 쉴새없이 드나든다.

덕분에 간병인 메리 가스의 일만 더 늘었다.

그러나 페더스톤 노인은 병석에서도 형제자매를 향해 일갈한다.

 

너희들 같은 건 하나도 생각나지 않을 거다.

유언장은 다 되어 있어. 알겠나, 다 되어 있단 말이다.”(524)

 

영감이 이렇게 나오면서 프레드네 식구들만 자기 옆에 있게 하니까

철딱서니 프레드의 기대감은 더 부풀어 오르는 중이다.

 

미들마치 BBC 미니시리즈 - 프레드, 메리 & 페더스톤 이모부

 

밤이 깊었다.

병자 수발과 방문객들 뒤치다꺼리에 메리 가스는 허리가 휠 지경이다.

악덕만 남은 늙은 인간에 대해좋은 감정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노인은 새벽 3시까지 잠도 안 자고 금고의 놋 열쇠 다발을 찰칵거리며 메리를 괴롭힌다.

 

내 머리는 멀쩡하단 말이다.()

나는 유언장을 두 가지로 만들어 두었는데,

그 한쪽을 태워 버리기로 했어...

이 열쇠를 정면의 자물쇠에 꽂아서 돌리는 거야.

알았으면 지금 말한 대로 해라.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서류를 꺼내거라.

최종 유언장과 서약서라고 큼지막한 활자로 인쇄되어 있어.”

 

노인은 제정신인 걸까? 뭔 소리를 하는 거지? 누굴 물 먹이려는 거야?

 

쇠금고에도 유언장에도 손을 댈 수 없어요.

남들에게 의심받을 만한 일을 하는 건 거절할 수밖에 없어요.”

(역시 메리답구나)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데도 그러는구나!”

 

날이 샐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아침이 되면 모두 일어날 테니까요.

아니면 하인을 불러서 변호사님을 모시러 보낼까요?”

 

메리는 무서웠겠지. 아니 궁금하기도 했겠지.

자기가 노인을 도와 유언장을 꺼내오면 누군가와 누군가의 운명은 뒤바뀔 테니까.

누군가, 그 누군가는 정말 누구일까.

도대체 누구를 염두에 두고 유언장을 태워버리겠다는 걸까.

작가 조지 엘리엇은 야속하도록 힌트를 주지 않는다.

 

엔틱 포토 - 실크에 새긴 에칭/메리 가스와 페더스톤 노인

 

페더스톤 노인은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울기 시작한다.

 

변호사? 내가 변호사한테 무슨 볼일이 있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야.(엉엉)

, 이 돈을 받아라. 200파운드는 된다... 내 돈을 받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거야.”(엉엉)

 

로저먼드처럼 미모라는 자원도 없고, 명사 집안이랍시고 써먹을 아빠찬스도 없는

메리는 돌봄 노동의 현장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같은 이십대 초반의 여성이지만 젊음을 누릴 수조차 없는 메리에게는

결혼이라는 선택지조차도 허영이었다.

메리는 거의 소녀가장이 아닌가.

철딱서니 프레드 덕분에 동생의 도제 수업료까지 날린 상황인데,

갑자기 200파운드라그 돈 때문에 메리는 순간이나마 얼마나 괴로웠을까.

 

뿌옇게 하늘이 밝아왔다.

메리 가스는 난로에 장작을 더 지폈다.

방 안 구석까지 환하게 불빛이 번져나갔다.

메리는 조심히 노인에게 다가가보았다.

메리의 마음은 지금까지도 불안하고 산란했다.

 

내 판단과 행동이 옳았을까. 실수였을까. 나는 함정을 잘 피해간 걸까. 아니 이미 함정에 빠진 건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그 순간 어떤 판단을 내려야 했던 걸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그런데 이상하다.

 

노인의 얼굴도, 손도, 가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 어느 것도, 그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다음 회 읽기 : https://bookinthegap.com/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