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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의 서재

<클래식 시대를 듣다> 대표의 특명

by 북인더갭 2011. 12. 14.

<클래식 시대를 듣다>

 

김실땅

 

어느새 12월이다. 근데 나는 여름만 지나면 한해가 저물었다 여기는 사람이다.(성질 급한 한국사람^^) 9월에 혹독한 비염이 찾아오면 계절의 변화에 굴복하며 한해를 나름 성급하게 정리한다. 그러니 나에게 12월은 한해의 종지부를 찍고도 남은 그 몇 달 중 어쨌든 숫적으로 맨 끝달인 어떤 ‘때’이다. 사실 1월이건 12월이건 그 어느 때에도 딱히 갖다붙일 의미가 내겐 없다. 이런 삶이 제대로 된 삶인지는 잘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하루하루를 땜빵하듯 겨우 살다보니 2011년이 다 지났다. 

일 때문에 대충 들춰본 책은 빼고,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꼼꼼히 읽은 책이 얼마나 되나 한번 헤아려보았다. 괜히 수첩을 뒤적거리고픈 어느 밤의 이벤트라고나 할까. 읽은 책이 굉장히 많을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어림잡아 한 달에 두 권 꼴 읽으며 한해를 보냈다. 아, 책을 읽지 않으며 책을 만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사람마다 기준은 다르겠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더, 좀더! 라고 꾸짖는다.  

그런데 더 찜찜한 건, 몇 권 안 되는 책들도 읽고 나면 손과 마음에서 금방 떠나간다는 점이다. 물론 종종 그렇지 않은 책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 책의 폐해라면 가까이 두고 자꾸 펼쳐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할 정도로 괴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책읽기의 기쁨과 감동의 시달림(!) 때문에 (아마도) 지금껏 책을 놓지 못하는 건 아닐까.

 

정윤수를 잡아라

두께부터 다르다. 허걱, 이걸 언제 다 읽나… 하지만 웬걸. 한 장 한 장 읽다보면 ‘이 놀라운 책은 더 아껴 읽어야 해’ 하는 열망에 사로잡힌다.

 음악은 누구에게나 첫사랑일 수 있다. 세상에 눈 뜨고 자신을 향해 눈을 뜰 때 사람들 귀에는 마침 음악이 들린다. 신비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 음악과 친숙해지다 보면 음악가가 살았던 시대며, 그/그녀가 태어난 도시의 어느 작은 골목, 아니면 그들이 품었던 사상과 그들을 둘러쌌던 유행이며 시대정신, 때론 가족이나 애인 등등 잡다한 게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똑같은 음악을 다른 예술 장르에선 어떻게 형상화하고 변용했는지가 미치도록 슬슬 궁금해지는 것이다. 사랑의 집요함이란 이런 것. 지은이 정윤수는 인생이 겪는 사랑의 열병을 다 겪어봤다는 듯 친절히도, 깊이 있게, 하지만 겸손하고 따뜻하게 들려준다. 딱 잘라 말해, 눈부신 필자다.

 정윤수를 잡아야 한다. 대표님의 명령이 떨어진다. 덜 떨어진 괴엑실땅(표준어로는 기획실장^^)은 겨우 알아낸 정윤수 필자 연락처로 꿈속에서 전활건다.

괴엑실땅 : 저어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정윤수 선생니임 네, 여긴 부긴더개빕니다.
정윤수 : 뭐요? 부기?, 뭐라구요?
괴엑실땅 : 북,인,더,갭,입니다.
정윤수 : 북인더갭? 그게 뭐요? 뭐하는 곳이오?
괴엑실땅 : 출판삽니다.
정윤수 : 뭐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출판사가 다 있소?

괴엑실땅은 아마 찍소리 못하고 전활 끊을 것이다. 아, 잡아야 하는데. 이런 필자를 놓치면 안 되는데… 대표님껜 뭐라고 변명을 하지, 땅을 치면서.

쉽지 않다. 페이지마다 소개되는 아티스트나 인용하는 책까지 두루 섭렵하지 않은 상태라면 읽다 포기할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2장 ‘바흐 조화로운 세계를 향한 꿈’을 보자. 첫 페이지에 벌써 브레히트의 시 「마리아의 추억」이 나온다. 그 아랫줄에 독일영화 <타인의 삶>이 소개된다. 두 작품을 몰라도 읽는데 큰 지장은 없다. 하지만 뭔 소리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은 사람은 시와 영화를 곱씹으며 읽게 될 것이다. 나중에 찾아 봐야지… 하면서. 여튼, 브레히트 시에 등장하는 덧없는 키스의 기억과 구름 한 조각을 핑계로 필자는 아우구스부르크라는 작은 도시를 다시금 떠올리며 그 도시에서 들렀던 한 교회를 언급하는데, 이때부터 사건은 시작되는 것이다. 어느 노인의 손가락이 그저 꾹 눌렀을 파이프오르간에 소리에 그는 독침이라도 맞은 듯 깨어나는 것이다. 바흐, 오오 바흐, 하면서.

바흐가 나오기까지 브레히트와 영화 <타인의 삶>을 거쳐, 아우구스부르크라는 브레히트의 고향인 작은 도시를 또 거쳐, 그 도시의 성 안나 교회에 생각없이 발을 디뎠다가 파이프오르간 소리에 두 무릎 꿇으며 드디어, 바흐, 오오 바흐, 로 이어지는 과정이 너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냥 빨아들이는 힘이 있는데, 다시 또 딱 잘라 말하자면, 그렇기 때문에 정윤수는 경건한 필자인 것이다.

음악을 듣기 전에, 음악가를 만나기 전에 그러한 음악이 가능할 수 있었던 시대 속으로 풍덩 빠지는 일, 자기도 모르게 일상에서 ‘클래식시대’로 밀려가는 기이한 체험은 가히 21세기에 만끽하는 타임머신 놀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 시대엔 천재와 기인만 살았던 게 아니다. 궁정이나 교회에서 평생을 노예처럼 살았던 그/그녀들을 만날 수 있다. 시대의 알력과 이데올로기를 아우르는 보스를 만날 수도 있고, 상처와 분노로 열병을 앓는 루저도 만날 수 있다. 그들도 시대 속에 살았던, 나처럼 하루하루를 땜빵하듯 겨우 살았던 사람들일 수 있는 것이다. 시대를 듣는 재미는 그래서 남다른 것이 아닐까.

예술 관련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내뱉곤 하는 불쾌한 질문이 있다. 그래서, 어찌라고, 당신이 떠벌려놓은 소비와 탐욕과 허영을 포장해 세상에 책이랍시고 내놓은 당신을 어찌라고, 당신의 진심과 감동은 찾을 수 없고 배려와 공감의 따뜻함도 느낄 수 없는데, 당신의 얄팍함을 나더러 으찌라고.

『클래식 시대를 듣다』는 올해 내가 읽은 책 가운데 단연 최고의 책이다. 암, 두말하면 잔소리. 그 어떤 불쾌한 질문도 떠오르지 않는다. 페이지마다 도전이요, 문장마다 영감이다. 내 옆에 가까이 두고픈 책을 향한 사랑은 체험할 때마다 새로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