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실땅
아무나, 아무렇게나, 거칠게, 길게 말해도 틀렸다 말할 수 없는 주제가 우리 삶에 있다. 이럴 때 보면 삶은 공평하다. 정답이 없으니 저 하고 싶은 말 맘대로 하고, 아름다운 전례가 없으니 딱히 책임지거나 행동에 옮길 필요도 없다. 말 좋아하는 사람이나 말 싫어하는 사람이나 도전해볼 만한하다.
한 명의 시민으로 정치를 건드릴 만한 자신의 언어를 가졌다는 건 대단한 특권이다. 사실 말하고 싶어도 어떤 언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디서 들은 말을 안전하게 따라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누구나 말은 하는데 비슷한 얘기만 되풀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진보의 발견?
『정치의 발견』을 읽는 내내 ‘흥분’, ‘자기확신’, ‘열정’이란 낱말이 ‘진보’라는 말과 만났을 때 생겨나는 의미의 반전을 생각해보았다. 맥락을 따라 읽다보면 ‘과도한 자기확신’, ‘넘치는 열정’, ‘이루는 것 없이 흥분만’처럼 위의 낱말들은 진보에 대한 아쉬움을 지적하는 수식으로 거의 사용되었다. 또한 책을 읽다 ‘진보’라는 낱말이 나오면 그 자리에 ‘초보’라는 낱말을 넣어 읽어도 흐름이 어색하지 않았다. 도대체 진보를 향한 필자의 태도는 어떤 마음인지 애매하다. 어떤 순간에는 애정이 지나쳐 진보를 발전시키고 보호해야 하는 지지자로 읽히다가도, 다른 순간에는 마치 퍼즐의 남은 단 한 조각, ‘진보’라는 퍼즐 조각 때문에 정치판의 그림이 망가진다고 화를 내는 듯 들리기도 한다. 필자가 중요시여기는 대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 선거라는 영향력 있는 정치과정을 ‘진보’가 알아주지 않기 때문인지, 화부터 내는 진보가 수준미달이라 여기기 때문인지, 여튼 진보진영에선 억울한 맘도 들었을 듯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책을 오해한 상태에서 첫 장을 펼친 내가 잘못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정치학 입문서는 분명 아니다. 『정치의 발견』 필자로선 진보에 대한 일침이 꼭 필요하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진보적이되 좀 더 정치적이고 좀 더 인간적이 되어야’(24쪽)라고 지적할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책장을 덮을 수는 없었다. 정치는 한정지어 말하든 넓게 말하든 정답이 없으니까. 그리고 정치의 본성, 특히 우리가 놓치는 악마적 본성을 이해하는 데 좋은 지침서이기도 했고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해서도 기본지식을 다질 수 있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정치의 발견’이란 제목보다 ‘진보의 발견’이라 말하는 게 양심적인 제목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필자 박상훈에게 막스 베버에게서나 얻을 수 있는 내공을 바랐던 걸 수도 있다. 보편타당 하면서도 따뜻하고도 날카롭게, 깊이와 넓이 두 날개로 읽는 이를 압도하는 정치 에세이는 정녕 우리에겐 먼 얘기인가. 진정한 정치학자로, 아니면 현실 정치인으로, 또는 정치평론가로, 정치를 놓고 누구나 아무렇게나 말할 수는 있지만 자신에게 가장 정직한(!) 옷은 어떤 옷인지, 영향력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생각하고 글을 써야 독자들도 언어를 갖게 될 듯하다. 그러니까 나는 어느 진영에서든 수긍하며 읽을 수 있는 보편타당한 정치 에세이를 기대했는데, 좀더 기다려야 하겠다.
권력지향적 시민
나에겐 정치적 성향이 없다, 고 예전엔 생각했다. 그러면서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을 꺼리며 거리를 두기도 했다. 정치적 성향이 강한 사람이란, 그러니까 말이 많거나, 자신만이 옳다 주장하거나, 너는 잘 모른다고 상대방을 매도하거나, 굳이 편을 가르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하는 사람? (내가 넘 나쁘게 말했나?) 그런데 되돌아보니 그들과 거리를 두려는 나의 의지야말로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그리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맘 깊은 구석엔 누구나 상대방을 향한 폄하와 매도의 칼을 숨기고 있지 않나 싶다. 당연하다. 정치의 본질상 어떻게 그 속에서 강제력을 뺄 수 있으며 ‘언어’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선수’들을 당해낼 수 있겠는가. ‘정당한 폭력’을 행할 수 있는 정치권력을 멀리서 욕하는 게 가장 쉽지 않겠는가. 너만 잘났냐, 너만 잘났어? 하는 정도의 곤조야 시민의 오래된 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정치적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정치권력이 싹트지 않을 공동체도 없다. 대표와 괴엑실땅 단 둘 뿐인(직원은 단 한 명도 없는!) 북인더갭 사무실에서도, 초딩 자녀와 허수아비 같은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권력의 다툼은 첨예하고 권력 배분의 양상 또한 나름 복잡하다. 그래서 정치를 공부한다는 것(정치가로 입문한다는 뜻이 아니다), 시대의 정치현상을 남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해석할 힘을 기른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자원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에는 그러한 과정에 도움을 주는 작은 미덕이 있다.
내가 나타내는 정치성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수긍하는 정치적 이성이란 너무 이상적이지 않은가 생각해본다. 한국에서 40대 중반의 여성(소위 아줌마)이자, 수도권 아파트 소유자, 기혼에다 사지 멀쩡한 신체조건의 대졸자, 그리고 읽고 쓰는 게 가장 재밌고 쉬웠던 한 시민이자 익명의 그녀. 그녀의 정치성…? 나열해 보니 평범하다. 그런데 쬐금 다르게 바라보면 그녀는 익명이 아니기도 하다. 나에겐 집이 있다. 그런데 전젯값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에겐 가정도 있다. 남들처럼 지지고 볶으며 살망정 돌아서서 서로의 가슴에 상처를 주고받진 않았다. 하지만 돌싱들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는 어디든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언제든 갈 수 있다. 그런데 몸이 불편한 사람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는 어떤 남자를 사랑했고 어떤 남자였던 그 남자랑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동성애자들이나 결혼을 원하는 미혼자들이 나의 글을 읽는다면. 나는 대학물을 나름 많이(?) 먹었고 그래서 가방끈이 중간 이상은 된다. 그러나 여러 이유로 대학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다면. (쏘왓, 박수라도 쳐주랴??)
그렇다면 나는 대단한 특권층일지도 모르는 권력지향적 시민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소수자인 여성으로서의 내 존재는 이 글에선 일단 넘어간다) 이것이 나의 정치성의 기본이라 생각하니 평범하다 쉽게 말해선 곤란할 듯하다. 정치가 바르게 행해지는 공동체에선 누구도, 어떤 소수자도 배제되어선 안 된다는 게 나의 정치적 이성인데, 내가 순진했다. 자신은 그 어떤 소수자의 입장에 서 본 일도 없으면서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르고 정당하고 용감하다고 확신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없다. 정말 없다. 억지로 갖다 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발휘하는 정치편력의 수준이다.
나도 ‘정치적이고 인간적’이고 싶다. 박상훈의 지적대로 그러기 위해선 화부터 내면 안 되고, 나의 전인격이 타인에게 매력적으로 작용(하도록) 진솔해야만 한다. 앞으로는 내가 체험해보지 못한 삶에 대해 다 아는 척해선 안 되고, 그들을 계몽한답시고 먹물값 해서도 안 된다. 왜냐면 나는 더욱이 책을 만드는 사람이니까, 글을 쓰는 사람이니까, 어떤 무기보다도 위협적이고 살인적인 ‘펜’이라는 무기를 나는 재밌다고 갖고 놀기도 하니까.
정치는 정치판에서만 하는 게 아니라 나란 존재의 말과 행동 그리고 결정 하나하나가 모두 정치적인 파장이 되어 사회로 향한다는 걸 다시금 깨닫는다. 거대한 물살이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고도 집요한 기운을 나와는 먼 세상의 일이라 느끼며 지금껏 살았을까.
『정치의 발견』을 읽으며 자신의 정치성을 점검받아보시는 2012년 되시길 바란다. 그래서 올 한해 모두 이 사회 안에서 각자가 맡은 민주주의의 몫을 멋지게 감당하시길.
늦은 새해 인사를 드리며 검토하던 원고로 눈과 마음을 다시 고정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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