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에디터의 서재

레알교양인으로 낙인찍힐 때까지

by 북인더갭 2012. 6. 18.

에디터의 서재 3

이계삼 <영혼 없는 사회의 교육>(녹색평론사 2009)

 

레알교양인으로 낙인찍힐 때까지!

 

김실땅

 

 

내 주변에 늘 책을 끼고 사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길 최근 『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을 읽고 되도록 자전거를 타기로 했다 한다. 원래는 바퀴가 두어 번만 굴러갈 그 어떤 가까운 거리라도 차를 몰고나가는 사람이라 왜 저러나, 늘 말리고 싶었는데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차를 끌고 나가선 차가 막힌다고 분노하며 길거리 운전자를 향해 욕을 하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는 사람, 겉보기엔 점잖은데(책도 많이 읽는 사람이!!)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랬던 사람이 책에 도대체 뭐라 나왔기에 그런 기특한 결단을 내리고 실천에 옮기는 것일까.

 

나는 이 세상을 ‘힘의 세상’이라고 나름 규정한다. 내 규정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따질 필요없다. 다른 이들이 다른 개념으로 삶을 규정해도 그것도 부분적으로 다 옳은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삶을 완벽히 알고 나서 말을 하려면 평생 입을 꾹 다물 살아야 하는데 그건 또 너무 답답하고 비겁하다.

 

그렇다면 내게 힘이 있는 걸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 힘은 의미없이 남용해버려야 제맛(?) 아닌가. 먼저, 세상 사람들의 방법을 따라해야 한다. 그 방법은 어렵지 않은데 모든 힘은 일단 일상 속에서 ‘소비’의 형태로 흉내낼 수 있다. 소비가 가능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당장 돈이 없어도 카드가 있으니 필요도 없는 걸 사들이고, 아직 쓸 만한 걸 버리기에 어려움은 없다. 만족도 감사도 없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사람들은 이것을 풍요로운 삶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니까 즉, 힘이 있는 사람은 ‘소비자’로 살 수 있는 사람이다.

 

좋다. 늘 ‘고객님’ 소리 들으며 사는 것도 말 그래도 제 멋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치는 일에서도 소비자 마인드로 일관한다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있을까 싶다. 교육산업이란 말을 혼자 되뇌어보곤 한다. 이것도 산업이었다. 교육도 인풋이 있고 아웃풋이 있어 가시적이고 실제적인 이윤을 남겨야하는 시장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짜증난다. 아이들이 누려야 할 귀한 자유와 건강한 사유는 그럼 어떻게 키워주고 존중해주란 말인가.

 

휴일을 맞아 자동차를 몰고 여행을 떠난다고 할 때, 그 목적지와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고성능 자동차를 만든 기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쉽게 고장 나지 않는다거나 공기조절장치가 우수하다거나 자동차의 속도가 빠르다는 등등 그런 문제들은 기술로 얼마든지 실현가능하다. 하지만 그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런 기술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서경식, 카토 슈이치, 노마 필드 『교양, 모든 것의 시작』(본문 45쪽)

 

자동차를 타고 어디로 갈 것인가, 이것을 결정하는 게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럼 이건 무엇으로 가능한 일인가.

 

마음으로 꿈꾸던 자연의 한 풍경이나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 작은 골짜기나 오솔길을 그려본 적 있는가. 자동차야말로 소비로 치자면 화끈한 아이템의 대명사이다. 최고의 연비, 동급최강의 세단을 소비의 형태로 소유했다 치자. 그 다음엔? 이 차를 몰고 나만의 파라다이스로 떠날 수 없다면, 그래서 할 일 없이 바람소리 산새소리를 들을 마음의 넉넉함이 없다면, 아니 어디로 떠나야 할지 도무지 몰라 누군가 목적지를 골라줬으면 싶어 패키지여행 상품을 끝내 검색하기 시작한다면, 이 자동차는 내 삶에 무슨 의미란 소리인가. 내 취향을 설명할 수 없고 내 소망이 무엇인가 스스로도 알 수 없으니 남들 많이 찾아가는 곳에 나도 똑같이 돈 내고 갔다온 걸로 여가를 ‘소비’해놓고, 환상의 테크놀로지가 나를 좀비로 만들었다고 어디다 대고 하소연 하겠는가. 아니, 이게 하소연할 일인가를 깨달을 인식이라도 있는가. 노브레인이란 이런 사람을 일컫는 말 아니겠는가.

 

카토 슈이치라는 일본 지식인 할아버지가 제시한 삶의 작은 한 예가 바로 ‘교양’의 가치를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을 읽다 줄을 벅벅 그은 부분도 위의 내용과 일맥상통한 부분이었는데, 교양에 대한 더욱 날카로운 이계삼의 통찰은 나를 쥐구멍 찾도록 몰아세우고도 남았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양이란 책을 많이 읽는 것, 논리적으로 우수한 글을 쓰는 것과 별 상관이 없다. 이 시대의 우수한 교양인은 이 타락한 말과 글의 지배에 더욱 깊이 감염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 살아있는 세계를 믿지 않고 말과 글을 존중하는 도착된 의식, 현실적인 쓸모밖에 볼 줄 모르는 유치한 계산속, 쓸데없는 엘리트의식으로 양 어깨가 빵빵한 가련한 허수아비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는 말이다. 교양이란, 실제적인 쓸모가 없고, 값없이 주어져야 하며, 그 값없음, 쓸모없음으로 제 쓸모를 찾는다. 교양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기술이 자신의 사회적 성취를 위한 불가결한 수단이 되는 그 순간부터 교양은 타락한다.(.『영혼없는 사회의 교육』  본문 63쪽)

 

논술학원을 차리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봤다. 그런 권유의 뒷맛은 늘 찜찜하다. 돈 좀 벌어봐? 나도 한번 벌어봐? 아이들 머리수대로 돈을 따져봐? 어차피 아이를 돈으로 키우기로 작정한 부모 소비자들 돈 좀 끌어모아봐?

 

기숙논술학원을 차린다. 나는 그곳에서 논술을 배우겠다 몰려든 아이들에게 한가하게 시를 읽히고, 두꺼운 고전을 함께 읽으며, 같이 여행도 떠나고, 음악 듣다 졸리면 낮잠을 자고,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같이 장을 봐와 함께 만들어 먹고, 밤에 잠이 안 오면 낮에 읽던 부분을 필사하도록 시킨다.

 

그러면 부모들은 몽둥이를 들고 나를 찾아올 것이다. 그게 아이들 성적과 무슨 상관이야, 당신이 이러고도 사기꾼이 아냐, 애들을 폐인으로 만들었잖아, 우리 애들 대학 못가면 다 당신 책임이야! 교양이 밥 먹여줘?

(순 밥통들 같으니라구)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교양은 밥을 먹여준다. 나는 확신한다. 삶의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고 건강하게 상대방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아이들, 같이 울어줄 줄 알고 웃어줄 줄 아는 아이들, 사회의 전문가랍시고 고액 연봉에 만족하기보다 기술의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느리게 사는 아이들, 그늘진 곳의 약자를 위해 같이 싸울 줄 아는 아이들, 그들 정서의 밑바탕엔 쓸모없는, 순진한, 소박하고도 따뜻한 교양이 자리잡고 있다.

 

교양처럼 무시받기 쉬우며 곡해되기 쉬운 개념이 또 있을까. 부모들은(=세상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교양인이 아닌 전문가가 되길 원한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가 전문기술이나 전문지식을 익혀 일반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직종에서 일하길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영어를 잘해야 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

 

한편 반대로, 기술처럼 추앙받으며 칭송되는 개념도 사실 찾기 힘들다. 기술은 우리를 편리하게 해주었고, 불가능하다 여겼던 병도 고쳐주었으며, 지구 반대편 나라의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아 우리도 세계인 시늉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술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방면에 머리가 반짝이는 사람들은 당연히 연구하고 노력하여 많은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기술을 계속 개발해야 한다. 그러나 단, 그들은(또한 우리 모두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전에 교양인이 되어야 한다. 전문가의 길로 성공을 향해 혼자 빨리 달리던 중이었다면 교양인의 길로 갈아타 느리게 다같이 가야 한다. 건강한 양심을 공격하는 유혹을 혼자 물리치기 힘드니 옆의 사람과 연대해야 한다. (카토 슈이치 할아버지는 어디로 갈 것인가만 얘기했지 누구와 갈 것인가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누구와’ ‘어디로’ 가는가는 막상막하 중요하다.) 기술이 편리하지만 얼마나 위험한 수단인지 알기 위해선 전문기술이 아닌 교양이 먼저 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교양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지속적인 과정이다. 어느 한시절 책 좀 읽고 글 좀 썼다고 교양인이 되지 않는다. 교양은 드러나지도 않고 내세울 것도 없는 순수하고 도도한 정신의 흐름이다. 교양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없이 즐거이 멍 때릴 수 있는 힘이다. 상품화 될 수 없고 시스템화 될 수 없는 잡생각을 즐기며, 공감하는 마음을 잃지 않으며, 인간이 기꺼이 짊어지고 가야할 고독을 피하지 않는 용기, 남들 다 가는 길이니 옳을 거라 생각하며 노브레인 좀비처럼 따라가지 않는 삐딱이 근성, 나 하나가 변한다고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며 공격하는 세상을 향해 실천의 무기를 휘두르는 배짱, 이러한 자양분 속에서 교양은 자라난다. 겉치레주의자의 교양이 아닌 레알교양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이계삼의 글을 곱씹을 때마다 내가 천착했던 말과 글도 얼마나 병들고 뒤틀린 도구였던가(=나의 오만이 얼마나 언어를 병들게 했던가!), 그것들을 통해 나는 나의 말발과 글발에 얼마나 도취되었으며, 말과 글이 뒷받침 되는 않는 사람을 내심 얼마나 무시했던가, 나는 심히 쪽팔린 책읽기의 시간을 경험했다. 레알교양인이라면 말과 글을 학대해선 안 된다. 말과 글을 혹사시켜도 안 된다. 말과 글을 더럽혀서도 안 된다.

 

우리가 늘 우스갯소리로 던지는 질문, 책 한권 읽는다고(=멍 때린다고,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고장난 거 고쳐 쓴다고, 나 하나 차 안 끌고 나간다고)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내 생각엔 이 질문은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바꿔야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책 한권 읽는다고(=멍 때린다고, 어려운 사람 돕는다고, 고장난 거 고쳐 쓴다고, 나 하나 차 안 끌고 나간다고) 내 영혼에 밥이 나와 떡이 나와?

 

나온다. 다 나온다. 병들고 고갈된 영혼에게 고단백 저칼로리의 건강식과 시원한 생수가 그 즉시 제공된다.

 

당장에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여겨지는 일들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 귀하고 귀한 여가마저 돈으로 소비해놓고도 뭐가 잘못 돌아가는지 모르는 세상이다. 아이들을 병든 좀비로 만들어놓고선 그들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며 폭력을 가하는 세상이다. 영혼없는 사회가 생명의 아이들을 사육(!)한다고 말하는 게 과장이 아닌 현실이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걸어서 이십분여 걸린다. 컨디션이 아주 안 좋거나 폭우, 폭설, 방사능낙진 등 이상기후가 아닌 이상 앞으로도 계속 걷거나 자전거를 타겠다. 오피스텔이 위치한 동네를 현대판 버전으로 재미삼아 표현해보자면 좌청룡우백호가 아닌 좌클레오파트라 우호텔캘리포니아다.(이곳이 뭐하는 곳인지는 상상에 맡긴다)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싶을 뿐이다. 뿐만 아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표현해보자면 배산임수가 아닌 배코스트코 임홈플러스다. 완벽한 명당자리다. 이백여미터 북쪽으로 걸어가면 이마트도 어김없이 나를 기다린다. 내 잠재된 소비의 욕망을 이토록 가까이서 충동하는 괴물들. 집앞에 있는 한국유통, 코사마트, 두배로마트로는 내 소비욕구가 충족되지 못함을 고백한다. 사는 동네를 핑계삼아 넘어가선 안 될 일이지만 실천의 의지는 왕왕 무너진다.

 

말과 글에 자신이 있다 우쭐대는 나는, 평생 레알교양인으로 살고 싶은 나는, 어른인 나는, 무엇보다 엄마(!)인 나는, 영혼에도 따뜻한 세 끼의 밥을 챙겨줘야 한다는, 거룩하고도 두려운 책임감을 욕망과 탐욕의 명당자리에서 이제야 통감한다.

 

누구와 어디로 가려는가. 갈 곳이 있기는 한가, 같이 갈 사람은 있는가. 레알교양인의 힘을 더 늦기 전에 다같이 발휘해보자. 레얄교양인으로 낙인찍히는 영광의 그날까지! 왕왕 좌절한다 해도 적진 한가운데서 몸부림치는 김실땅을 동무 삼아 우리 서로 위로를 주고받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