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의 세계.
언제부턴가 청년 세대들 사이에서 '말이 안 된다'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우리 세대에는 잘 쓰지 않는 어법이니 확실히 새로운 언어라 할 만하다. 새로운 언어는 바뀐 환경에 대처하는 독특한 사고방식을 반영한다고 나는 믿는 편이다. 전 같으면 뭐랄까, 부당하다든가 아니면 정의롭지 못하다는 말을 썼을 것이다. 이런 말들에는 사회의 상식이나 제도, 도덕에 대한 강력한 구심력이 있고, 그걸 벗어나는 행동에 대한 못마땅한 감정이 담겨 있다. 그런데 '말이 안 된다'는 말 속에는 강력한 중심이 없다. 그건 제도와 도덕에 이를 필요도 없이, 이미 '내 선에서' 용납하기 어렵다는 토로에 가깝다.
요즘 자주 듣는 말로 '선 넘는다'는 말이 또한 그렇다. 이런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말'(언어)과 '선'(라인)에 담긴 개인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 세대가 절대적 가치로서의 '정의'와 '법' 같은 것을 중시했다면 지금 세대는 개인의 가치로서 '말'과 '선'을 더 중시하는 것 같다. 과연 정의와 법이 사회를 얼마나 올바르게 바꾸었느냐를 돌이켜볼 때, 이들의 태도에 수긍이 가는 면도 꽤 있다. 언젠가 나는 청년층의 사고법을 '수은주'에 비유한 적이 있었다. 좌나 우 같은 이념이 아니라 외부의 온도(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인데, 이런 생각은 청년=극우 같은 도식적 사고를 벗어나게 해준다는 이점이 있는 것 같다.

'말이 안 된다' '선을 넘는다' 같은 어법은 법이나 정의를 떠나서 '나한테는 기분이 나쁘다'는 사적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벤야민이 카를 크라우스를 평하면서 '신경의 힘'이라고 했던, '개인적인 거슬림'과 유사하다고 나는 짐작해보았다. 그런 사적 거슬림의 세계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위선'이다. <언어와 반언어>에 씌어진 크라우스의 재밌는 아포리즘에 의하면 '말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것'이 가장 거슬린다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말하는 것과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질타했다면, 지금 세대는 행동하는 것과 다르게 말하는 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우리는 말과 이성, 제도를 먼저 따졌다면 지금 세대는 행동을 먼저 바라본다. 그래서 '말이 되냐', '선 넘네' 같은 말은 사적인 동시에 훨씬 반권위적으로 들린다.
문제는 우리에게 언어인 것이, 젊은 세대에게는 언어로 여겨지지 않는 현상, 즉 '말 안 됨의 현상'이 급속도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속도를 따라가려면, 이전의 패러다임, 즉 진보와 보수, 좌와 우 같은 도식을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말로 따지기 전에 좀더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를 비롯한 앞 세대가...
카를 크라우스 <언어와 반언어> 북인더갭 2026
율.
